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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무라 요시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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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네무라 요시아키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내야수로 활약했다. 호토쿠 학원 시절 고시엔 대회에서 우승을 경험하고, 1981년 드래프트에서 긴테츠 버팔로스와 한큐 브레이브스에 1위로 지명되어 긴테츠에 입단했다. 긴테츠, 주니치, 세이부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FA를 통해 주니치로 이적한 최초의 선수였다.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 및 방송인으로 활동하며, 2018년에는 고시엔 레전드 시구에 참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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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무라 요시아키 - [인물]에 관한 문서
선수 정보
2023년 6월 3일,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의 금촌의명
2023년 6월 3일,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이름금촌의명 (金村義明)
원어 이름김의명 (金義明)
로마자 표기Gim Ui-myeong
출생일1963년 8월 27일
출생지일본 효고현다카라즈카시
신장185cm
체중88kg
포지션3루수, 1루수
투구/타석우투/우타
프로 입단 정보
드래프트 년도1981년
드래프트 순위1981년 일본 프로 야구 드래프트 1순위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첫 출장일본 프로 야구/1982년 9월 14일
마지막 경기일본 프로 야구/1999년 9월 30일 (은퇴 경기)
경력
고등학교보도쿠 학원 고등학교
프로 선수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1982 ~ 1994)
주니치 드래건스 (1995 ~ 1997)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1997 ~ 1999)

2. 선수 경력

호토쿠 학원 시절, 고등학교 3학년 때 에이스이자 4번 타자로 봄, 여름 연속 고시엔 대회에 출전했다.[3] 봄 선발 대회 1회전에서 마키하라 히로미가 이끄는 오부 고에 패했지만, 여름 선수권 대회에서는 팀을 전국 제패로 이끌었다. 양 대회 통산 타율 .577, 3홈런을 기록했다.[3]

고등학교 3학년 여름 전국 대회에서 "1회전 돌파"라는 목표를 모리오카 공고전에서 달성하고, 전년도 우승팀 요코하마 고와의 2회전에서 2타석 연속 홈런을 쳤다. 3회전에서 아라키 다이스케의 와세다 실업을 꺾고, 준준결승에서 후지모토 슈지의 이마바리 니시를 이겼다. 준결승에서는 쿠도 키미야스의 나고야 전기를 상대로 2루타 포함 3안타를 기록했고, 결승에서 교토 상업을 꺾고 우승했다.[3] 투수로서 첫 경기부터 결승전까지 6경기 모두 완투승을 거두었으며,[4] 여름 전국 대회 우승 투수로서 4번 타자를 맡아 전 경기를 혼자 완투한 선수는 과거 8명이 있지만, 이 대회 이후로는 나오지 않고 있다. 이 대회 통산 타율 .545(22타수 12안타 2홈런)는 여름 전국 대회 우승 투수로서 역대 2위(봄 포함 3위) 기록이다.[5] 다만, 완투승을 거둘 때마다 마운드에서 가츠 포즈를 취해 고노렌 관계자로부터 주의를 받았다.[7]

1981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긴테츠와 한큐의 1순위 지명을 받았고, 추첨 결과 긴테츠가 교섭권을 획득했다. 가네무라는 한큐 입단을 희망했는데, 한큐 전철 연선에 나가이케 토쿠지의 자택 근처에 생가가 있었고, "한큐 브레이브스 어린이회"에 가입했으며, 후쿠모토 유타카를 응원했기 때문이다.[8] 긴테츠의 독점 교섭권 획득 후, 한큐 구단에 미안함을 느껴 나가이케의 자택을 방문했고, 나가이케와 미와타 쇼리 스카우트로부터 격려를 받아 긴테츠 입단을 결심했다. 계약금 5500만, 연봉 400만에 계약했다.[9][10]

1981년 9월 한일 친선 고교 야구에 출전해 가족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2] 당시 조선적이었던 가네무라 가족은 임시 여권 취득에 어려움을 겪었으나,[2] 정부 배려로 부산의 친척들과 재회했고, 이후 한국 국적으로 변경했다.[2] 어머니로부터 "일본인이 아니니까 지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2]

드래프트 회의에서 한큐와 긴테쓰 양 구단으로부터 투수로 지명받았지만, 긴테쓰 입단 직후 내야수로 전향했다. 가네무라는 은퇴 후 "고등학교 3학년 봄 전국대회에서 맞붙었던 마키하라가 최고 147km의 속구를 던지는 모습을 보고 '나는 프로에 들어가도 투수로 통하지 않겠다'고 깨달았다. 여름 전국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었던 것은 컷볼변화구로 타자의 타격 의욕을 꺾는 데에 전념했기 때문일 뿐"이라고 밝혔다.[11]

입단 1년차인 1982년에는 웨스턴 리그 공식전 전 경기에 출전했다. 같은 리그의 선발 멤버로 출전한 주니어 올스타 게임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는 사이클 히트 (2루타홈런 → 세이부에 입단한 구도로부터의 3루타단타)를 기록함과 동시에 MVP로 선정되었다. NPB의 올스타 게임에서 사이클 히트를 달성한 것은 1군을 포함해도 가네무라가 처음이다.[12] 1986년 7월 17일 한큐전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1군 공식전 사이클 히트를 달성했다. NPB에서 1, 2군을 막론하고 올스타 게임과 공식전에서 사이클 히트를 기록한 선수는 가네무라뿐이다.

1985년까지는 1군에 정착하지 못했지만 사사키 교스케 코치의 지도하에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며 1986년부터 하네다를 대신해 3루의 주전으로 정착했다. "이테마에 타선"이라고 불린 타선의 중핵으로서 활약함과 동시에 그 호쾌한 이미지에서 "이테마에 대장"이라고 칭해졌다. 1986년에 처음으로 출전 경기 수가 100을 넘어 타율 .275, 홈런 23개(커리어 하이), 타점 67(커리어 하이)의 성적을 남겼다.[14]

1988년에는 세이부와의 퍼시픽 리그 우승을 격렬하게 다투던 시즌 막바지 경기에서 슬라이딩으로 왼쪽 손의 유구골을 골절했다. 아오키 아키라 감독을 비롯한 당시 수뇌진의 권유로 시즌 마지막 관동 원정에 동행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가네무라는 다음 날 "10.19" (가와사키 구장에서의 롯데와의 더블헤더)의 제2경기를 벤치에서 지켜봤다.[15] 1989년 평소 친분이 있던 한신 타이거스의 트레이너를 통해 공식전 개막 직후 자비로 수술을 다시 받았지만, 같은 해 시즌 초반에는 재활에 전념했다. 중반부터 전선에 복귀했지만, 리베라가 주전 3루수로 정착했기 때문에 주로 3루 수비 굳히기로 기용되었다.[15] 1989년 오픈전에서는 3월 16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9회 초 2사에서 일본생명 야구장 마운드에 "투수"로 등장했다.[17]

1991년에는 9월 26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전 (후지이데라 구장)에 3루수로서 출전했지만 9회 초에 포수 마스크를 썼다.[18] 1993년에는 공식전 개막부터 6월 5일까지 선발 출전했지만 부상으로 전선에서 이탈했다. 그 사이에 주전 3루수의 자리를 루키 오시마에게 빼앗겼다.

1994년에는 규정 타석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타율 .299로 호조였다. 나카무라 노리히로를 육성할 방침에 따라,[19] 시즌 종료 후 FA권 행사를 선언했다. 긴테쓰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선언이었고, 주니치로의 이적을 결정했다.[21] 13년간의 재적 기간 동안 1군 공식전에서 시즌 두 자릿수 홈런을 6번, 전 경기 출전을 3번 기록했다. 통산 성적은 타율 .258, 홈런 127개였다.

1995년 4월 18일에 세이부 라이온스 구장에서 열린 친정팀 킨테츠와의 경기에서 퍼시픽 리그 공식전에 3년 만에 출전했다. "7번·지명타자"로 선발 출장하여, 첫 타석에서 이적 후 첫 안타를 고이케 히데로로부터 솔로 홈런으로 기록했다. 이 해의 세이부는 좌타자가 많았고, 우타자로 기대받던 가키우치 테츠야나 타나베 노리오가 부상이나 부진으로 전력에서 이탈한 탓에 이후 지명타자 외에도 대타나 1루수로 1군 공식전에 기용되었다. 3할이 넘는 타율로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지만, 1997년 일본 시리즈에는 거의 출전하지 못했다. 팀이 2승 3패로 맞이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와의 1998년 일본 시리즈 6차전 (10월 26일)에 1점 뒤진 9회초 1사 1루에서 대타로 기용되었으나, 사사키 카즈히로에게 병살타로 막혀 팀의 시리즈 패배가 결정되었다[27]

1999년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경기가 된 9월 30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 (지바 마린 스타디움)에서는 1타석 한정으로 스타팅 멤버로 기용되었다.

2. 1. 프로 입단 전

호토쿠 학원 시절, 고등학교 3학년 때 에이스이자 4번 타자로 봄, 여름 연속 고시엔 대회에 출전했다.[3] 봄 선발 대회 1회전에서 마키하라 히로미가 이끄는 오부 고에 패했지만, 여름 선수권 대회에서는 팀을 전국 제패로 이끌었다. 양 대회 통산 타율 .577, 3홈런을 기록했다.[3]

고등학교 3학년 여름 전국 대회에서 "1회전 돌파"라는 목표를 모리오카 공고전에서 달성하고, 전년도 우승팀 요코하마 고와의 2회전에서 2타석 연속 홈런을 쳤다. 3회전에서 아라키 다이스케의 와세다 실업을 꺾고, 준준결승에서 후지모토 슈지의 이마바리 니시를 이겼다. 준결승에서는 쿠도 키미야스의 나고야 전기를 상대로 2루타 포함 3안타를 기록했고, 결승에서 교토 상업을 꺾고 우승했다.[3] 투수로서 첫 경기부터 결승전까지 6경기 모두 완투승을 거두었으며,[4] 여름 전국 대회 우승 투수로서 4번 타자를 맡아 전 경기를 혼자 완투한 선수는 과거 8명이 있지만, 이 대회 이후로는 나오지 않고 있다. 이 대회 통산 타율 .545(22타수 12안타 2홈런)는 여름 전국 대회 우승 투수로서 역대 2위(봄 포함 3위) 기록이다.[5] 이러한 활약으로 현역 은퇴 후에도 고교 야구 관련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한다.[6] 다만, 완투승을 거둘 때마다 마운드에서 가츠 포즈를 취해 고노렌 관계자로부터 주의를 받았다.[7]

1981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긴테츠와 한큐의 1순위 지명을 받았고, 추첨 결과 긴테츠가 교섭권을 획득했다. 한큐는 야마오키 유키히코를 재지명했다. 가네무라는 한큐 입단을 희망했는데, 한큐 전철 연선에 나가이케 토쿠지의 자택 근처에 생가가 있었고, "한큐 브레이브스 어린이회"에 가입했으며, 후쿠모토 유타카를 응원했기 때문이다.[8] 긴테츠의 독점 교섭권 획득 후, 한큐 구단에 미안함을 느껴 나가이케의 자택을 방문했고, 나가이케와 미와타 쇼리 스카우트로부터 격려를 받아 긴테츠 입단을 결심했다. 계약금 5500만, 연봉 400만에 계약했다.[9][10]

야구 외에 유도 초단을 땄고, 골프도 즐겼다.[44][31] 은퇴 후 자선 골프 대회에 참가하고, 코우즈마 진이치로, 아사치 요스케 등 프로 골퍼와 교류한다.[38] 셋째 아들 아키노리는 이시카와 료의 영향으로 스기나미 학원 고등학교 골프부에서 활동했고, 현재 프리랜서 프로 캐디로 활동 중이다.[38]

초등학교 시절 학급 위원을 맡을 정도로 우수했지만, 집안 형편은 어려웠다.[39] 중학교 졸업 후 취업 권유를 받았으나, 프로 야구보다 호토쿠 학원 고등학교를 동경했다.[8] 은퇴 후 특기생 제도에 찬성한다.[40] 형 히로오도 호토쿠 학원 출신으로 가와이 악기 경식 야구부에서 오가와 쥰지와 함께 뛰었지만, 49세로 사망했다.[41][42]

1981년 9월 한일 친선 고교 야구에 출전해 가족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2] 당시 조선적이었던 가네무라 가족은 임시 여권 취득에 어려움을 겪었으나,[2] 정부 배려로 부산의 친척들과 재회했고, 이후 한국 국적으로 변경했다.[2] 어머니로부터 "일본인이 아니니까 지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2] 아버지는 2019년 6월 별세했다.[44]

2. 2. 긴테쓰 시절

드래프트 회의에서 한큐와 긴테쓰 양 구단으로부터 투수로 지명받았지만, 긴테쓰 입단 직후 내야수로 전향했다. 가네무라 요시아키는 현역 은퇴 후 "고등학교 3학년 봄 전국대회에서 맞붙었던 마키하라가 최고 147km의 속구를 던지는 모습을 보고 '나는 프로에 들어가도 투수로 통하지 않겠다'고 깨달았다. 여름 전국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었던 것은 컷볼변화구로 타자의 타격 의욕을 꺾는 데에 전념했기 때문일 뿐"이라고 밝혔다.[11]

입단 1년차인 1982년에는 웨스턴 리그 공식전 전 경기에 출전했다. 같은 리그의 선발 멤버로 출전한 주니어 올스타 게임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는 멤버 중 한 명이었던 사이토 히로유키 (히로시마 도요 카프 내야수)로부터 경기 전에 물려받은 배트로 제4타석까지 사이클 히트 (2루타홈런 → 세이부에 입단한 구도로부터의 3루타단타)를 기록함과 동시에 MVP로 선정되었다. NPB의 올스타 게임에서 사이클 히트를 달성한 것은 1군을 포함해도 가네무라 요시아키가 처음이다.[12] 단, MVP와 사이클 히트 달성의 부상으로 상금(총액 139만)을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즌 종료 후의 계약 협상에서는 구단으로부터 상금만큼의 삭감을 제시받았다. 가네무라 요시아키는 1군의 공식전에 거의 출전하지 못했던 것도 있어서 이 제시를 마지못해 받아들였다.[13]

1986년 7월 17일 한큐전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1군 공식전 사이클 히트를 달성했다. NPB에서 1, 2군을 막론하고 올스타 게임과 공식전에서 사이클 히트를 기록한 선수는 가네무라 요시아키뿐이다.

1985년까지는 1군에 정착하지 못했지만 사사키 교스케 코치의 지도하에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며 1986년부터 하네다를 대신해 3루의 주전으로 정착했다. "이테마에 타선"이라고 불린 타선의 중핵으로서 활약함과 동시에 그 호쾌한 이미지에서 "이테마에 대장"이라고 칭해졌다. 은퇴 후 현재에도 "과거 호쾌했던 퍼시픽 리그의 이미지를 계승한 마지막 선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86년에 처음으로 출전 경기 수가 100을 넘어 타율 .275, 홈런 23개(커리어 하이), 타점 67(커리어 하이)의 성적을 남겼다.[14]

결혼 직후인 1988년에는 세이부와의 퍼시픽 리그 우승을 격렬하게 다투던 시즌 막바지 경기에서 슬라이딩으로 왼쪽 손의 유구골을 골절했다. 그 영향으로 출전 선수 등록이 말소되었지만 아오키 아키라 감독을 비롯한 당시 수뇌진의 권유로 시즌 마지막 관동 원정에 동행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가네무라 요시아키는 이 원정에서 우승을 결정할 경우에 대비해 골절 5일 후(10월 18일)부터 밤샘하며 축승회의 장소를 찾아다녔다. 게다가 다음 날 "10.19" (가와사키 구장에서의 롯데와의 더블헤더)의 제1경기를 3루 측 기자석에서 사복 차림으로 관전했다. NPB가 등록 말소 중인 선수의 벤치 입장을 인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오키 등 수뇌진의 배려로 사복 위에 팀 점퍼를 걸치고 제2경기를 3루 측 (긴테쓰) 벤치 내에서 지켜봤다.[15] 그 직후에는 왼쪽 손 유구골 수술을 받았다.

가네무라 요시아키가 후년에 회고한 바에 따르면 당시의 의료 기술로는 현재만큼 유구골 골절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었다고 하며, 다음 해인 1989년 오픈전 기간 중에도 수술 부위의 통증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16] 결국 평소 친분이 있던 사루키 타다오 (당시 한신 타이거스의 트레이너)를 통해 공식전 개막 직후 자비로 수술을 다시 받았지만, 같은 해 시즌 초반에는 재활에 전념했다. 중반부터 전선에 복귀했지만, 재활 기간 중에 구단이 획득한 리베라가 주전 3루수로 정착했기 때문에 본인 왈 "팀이 (전년의 '10.19'에서 놓친) 리그 우승을 달성했기 때문에 '10.19'의 분함을 씻어낸 기쁨이 컸다. 하지만 복귀 후에는 주로 3루 수비 굳히기로 기용되었기 때문에 주전 3루수로서 우승의 순간을 맞이했더라면 기쁨이 배가되었을 것이다"라고 한다.[15]

1989년 오픈전에서는 3월 16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9회 초 2사에서 일본생명 야구장 (당시 긴테쓰의 홈구장 중 하나) 마운드에 "투수"로 등장했다. 3점 리드 상황에서 등판하여 처음 상대한 시부이에게 단타 (중전 안타)를 허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타자 토마노를 1루 파울 플라이로 처리하여 경기를 마무리했다.[17] 가네무라 요시아키가 프로 입문 후 투수로서 대외 경기에 등판한 사례는 공식전이나 연습 경기를 포함해도 이 경기가 유일하다.

1991년에는 9월 26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전 (후지이데라 구장)에 3루수로서 출전했지만 9회 초에 포수 마스크를 썼다. 리그의 우승 경쟁에 있던 팀이 1군의 벤치에 있던 포수 (야마시타 가즈히코, 고쿠보, 미츠야마)를 전원 기용한 데다 8회 말 미츠야마의 타석에서 대타를 낸 것에 기인한다. 또한 가네무라 요시아키가 포수로 출전한 것은 현역 시절을 통틀어 이 경기가 유일했다. 단, 포수로서 1실점한 외에 팀도 6-7이라는 스코어로 후쿠오카 다이에에게 아쉽게 패했다.[18]

OB인 스즈키 게이지가 1군 감독으로 취임한 1993년에는 공식전 개막부터 6월 5일까지 선발 출전했지만 부상으로 전선에서 이탈했다. 그 사이에 주전 3루수의 자리를 루키 오시마에게 빼앗겼다.

1994년에는 규정 타석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타율 .299로 호조였다. 그 한편으로 1군 감독인 스즈키와 1군 작전 겸 배터리 코치인 나시다 마사타카는 가네무라 요시아키와 포지션이 겹치는 나카무라 노리히로를 육성할 방침을 세웠다.[19] 결국 나카무라의 부상, 스즈키 감독의 지도 방침,[20] 코치진과 구단 수뇌부에 대한 불신감 등이 겹쳐 시즌 종료 후 FA권 행사를 선언했다. 긴테쓰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선언이었고, 주니치 감독으로의 복귀가 예정되어 있던 호시노 센이치 등으로부터의 유혹을 물밑에서 받아 1억의 3년 계약을 제시받기도 하여 주니치로의 이적을 결정했다.[21] 하지만 "10.8 결전"의 영향으로 호시노의 감독 복귀가 1년 연기되었기 때문에 가네무라 요시아키가 이적한 시점에서는 다카기 모리미치 감독의 유임이 결정되어 있었다.[22]

13년간의 재적 기간 동안 1군 공식전에서 시즌 두 자릿수 홈런을 6번, 전 경기 출전을 3번 기록했다. 통산 성적은 타율 .258, 홈런 127개로 긴테쓰~오사카 긴테쓰 시대의 나카무라나 "이테마에 타선"에서 함께 중핵을 담당했던 랄프 브라이언트나 이시이 히로오를 밑돌았다. 가네무라 요시아키 자신도 "성적 면에서는 일류는 아니었다"라고 인정하고 있다.

퍼시픽 리그 심판원이었던 야마자키는 일선에서 물러난 후 "가네무라 요시아키는 하프 스윙이 많은 타자였다"라고 고백하고 있다.[23]

2. 3. 주니치 시절

4월 18일에 세이부 라이온스 구장에서 열린 친정팀 킨테츠와의 경기에서 퍼시픽 리그 공식전에 3년 만에 출전했다. "7번·지명타자"로 선발 출장하여, 첫 타석에서 이적 후 첫 안타를 고이케 히데로(킨테츠 시절 팀 동료였던 좌완 투수)로부터 솔로 홈런으로 기록했다. 이 해의 세이부는 좌타자가 많았고, 우타자로 기대받던 가키우치 테츠야나 타나베 노리오가 부상이나 부진으로 전력에서 이탈한 탓에 이후 지명타자 외에도 대타나 1루수로 1군 공식전에 기용되었다. 3할이 넘는 타율로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지만, 젊은 선수 기용을 우선시하는 수뇌부 방침에 따라 1997년 일본 시리즈에는 거의 출전하지 못했다. 다음 해인 에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와의 1998년 일본 시리즈에서 1차전과 6차전 (모두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의 원정 경기)에 출전했다. 팀이 2승 3패로 맞이한 6차전 (10월 26일)에 1점 뒤진 9회초 1사 1루에서 대타로 기용되었으나, 요코하마의 마무리 투수 사사키 카즈히로에게 병살타로 막혀 팀의 시리즈 패배가 결정되었다[27]

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경기가 된 9월 30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 (지바 마린 스타디움)에서는 1타석 한정으로 스타팅 멤버로 기용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또한, 킨테츠 시절을 포함하여 3번 출전한 일본 시리즈에서 소속 팀이 3번 모두 패배했다. 결국, 시리즈 우승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2. 4. 세이부 시절

가네무라 요시아키는 현역에서 은퇴한 후 프리랜서 '야구인'으로서 주간 베이스볼에 칼럼을 연재했다. 산케이 스포츠 기자와 동행하며 직접 일 의뢰와 출연 협상을 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28] 이 시기부터 2020년까지 NPB의 춘계 캠프 기간 중에는 해설자로서 취재를 위해 전 구단의 1군 캠프지를 방문했다.[28] (2021년에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취재를 단념했다.) 또한, 개인 사무소인 유한회사 카네무라 기획을 설립하고, 노모 히데오가 대표를 맡는 NOMO 베이스볼 클럽의 이사로 이름을 올렸다.[29]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기간에는 주간 플레이보이의 의뢰로 일본 대표팀 경기를 취재했다.[30] 정크 SPORTS(후지 TV)에 출연하여 입담을 과시하며 주목받았고, 2000년 8월부터 후지 TV 및 계열사인 간사이 TV 방송과 전속 야구 해설 계약을 맺었다.[31] 2001년부터는 J SPORTS 야구 해설자 및 스포츠 호치 야구 평론가로도 활동했다.[31]

후지 TV 야구 해설자로서 2017년까지 『프로 야구 뉴스』(후지 TV ONE에서 방송)의 화요일 MC를 맡았다.[32] 2017년을 마지막으로 후지 TV와의 전속 계약은 종료되었지만,[32] 『프로 야구 뉴스』에는 2018년부터 2022년까지 경기 보고 파트 해설자로 수시로 출연했다.

세이부 시절부터의 자택이 있는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긴테쓰 시절을 보낸 오사카나 주니치 시절을 보낸 나고야에서도 지역 방송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했다. 간사이 TV 제작의 한신 타이거스·오릭스 버팔로스 공식전 중계에 게스트 해설자로 출연하기도 했다. 『FNN 슈퍼 뉴스 앵커』가 방송되던 시기에는 목요일 제1부의 레귤러 코멘테이터로서 메인 캐스터인 야마모토 히로유키와 "야구 만담"이라 불릴 정도의 대화를 나눴다.

2015년 4월부터 2021년 9월까지 『우에이즈미 유이치의 에에나!』(MBS 라디오)에 월요일 파트너로 레귤러 출연했다. 한신 이외의 구단 사정도 곁들인 평론으로 인기를 얻었으며, 2016년부터는 MBS 라디오의 야구 해설자로도 활동했다.[33] 2017년부터 2020년까지는 자신의 첫 관 프로그램인 『MBS 밤부대 "가네무라 요시아키의 에에카겐니세!"』에서 퍼스널리티를 맡았다.[34]

2018년 5월부터는 니코니코 생방송 내의 『가네무라 요시아키 채널』(유료)에도 출연했다. 이 채널을 운영하는 스태프는 유튜브에 "공식 채널"을 설치하고, 니코니코 생방송 영상을 편집하여 광고를 붙여 공개했는데, 등록자 수가 10만 명을 돌파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35] 그러나 가네무라는 유튜브 활동에 관여하지 않았음에도 유튜버로 여겨졌고,[36] 광고 수익 배분 문제 및 무단 영상 업로드 문제로 인해 2020년 3월에 유튜브 채널을 폐쇄했다.[36] 니코니코 생방송 채널도 중단되었고, 유료 회원들에게는 Amazon 기프트권으로 보상했다.[37]

3. 은퇴 후

은퇴 후 가네무라는 주로 야구 해설가 및 방송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6년부터 MBS 베이스볼 파크의 고정 해설자로 출연하고 있으며,[61] 텔레비전한신 타이거스 경기 중계에도 자주 등장한다. 닛폰 방송과의 협력 네트워크를 통해 진구 구장에서 열리는 야쿠르트 대 한신 경기 중계 시 닛폰 방송에서도 가네무라의 해설을 들을 수 있다. 2017년까지 금요일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한신 대 요미우리 경기 중계는 TBS 라디오에서, 2019년부터는 한신 홈경기를 상대 구단 지역 방송국(도카이 라디오 등)에 중계할 때(주로 일요일 낮 경기)에도 해설을 맡는다. 2020년부터는 오릭스 버팔로스 홈경기 중계에서도 해설을 담당한다.[62]

또한, 가네무라 요시아키의 에에카겐니세ー!를 진행하며, 2017년부터 2020년까지는 나이트 오프 기간에 MBS 요루타이 화요일 생방송, 2021년 10월부터는 저녁에도 포치토 M라지 월요일 프로그램으로 편성되었다.

이 외에도 BANZAI! 야구광(J SPORTS), enjoy! Baseball(후지 TV・간사이 TV) , SWALLOWS BASEBALL L!VE(후지 TV ONE), 프로 야구 뉴스, 프로 야구 그럭저럭 옛날 이야기(Amazon 프라임), 주간 뉴스 리더(TV 아사히)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준고정 출연 프로그램으로는 오와라이 와이드쇼 마르코포로리!, 하토리 신이치 모닝쇼, 미즈노 마키의 마법의 레스토랑 시리즈 등이 있다.

3. 1. 해설자 및 방송 활동


  • MBS 베이스볼 파크 ※ 2016년부터 고정 해설자로 출연하고 있다.

:** 야구 해설자로서 MBS 라디오와 전속 계약을 맺고 있으며, 같은 타이틀을 사용하는 텔레비전의 한신 타이거스 경기 중계에도 수시로 출연한다.

:** 진구 구장에서 열리는 야쿠르트 대 한신 경기를 닛폰 방송과 상호 네트워크 형식으로 중계할 때, 닛폰 방송에서도 가네무라의 해설이 방송되는 경우가 있다.

:** 2017년까지 금요일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한신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경기 중계는 TBS 라디오에서 가네무라의 해설이 방송되는 경우가 있었다. 2019년부터는 한신 홈경기를 뒷송신 방식으로 상대 구단 지역 방송국(도카이 라디오 등)에 중계할 때(주로 일요일 데이 게임)에도 해설을 담당한다. 2020년부터는 오릭스 버팔로스 홈경기 중계에서도 뒷송신(STV 라디오, 규슈 아사히 방송 등) 해설을 맡는다.

:** 2016년 나이트 오프 기간에는 가네야마 이즈미 (마이니치 방송 아나운서)와 함께 『with Tigers MBS 베이스볼 파크 모두 홈인!』 일요판에 한 달에 한 번 출연했다.

  • 가네무라 요시아키의 에에카겐니세ー!

:** 2017~2020년 나이트 오프 기간은 「MBS 요루타이」 화요일 생방송, 2021년 10월 이후는 「저녁에도 포치토 M라지」 월요일 프로그램으로 편성되었다. 2015년 4월부터 『가미이즈미 유이치의 에에나아!』 월요일 파트너였기 때문에, 나이트 오프 기간에는 이틀 연속 MBS 라디오 생방송에 고정 출연했다.

:** 2021년 10월 개편으로 『가미이즈미 유이치의 에에나아!』가 평일 아침으로 이동하면서 「저녁에도 포치토 M라지」 레이블 틀이 신설되어, 『에에나아!』 월요일분에서 이어지는 형식으로 편입되었다.

: MBS 라디오 제작.
:** 후지 TV 제작 중계는 2017년에 전속 계약 종료.

  • SWALLOWS BASEBALL L!VE (후지 TV ONE)
  • 프로 야구 뉴스[62]
  • バラいろダンディ (TOKYO MX) ※ 2015년 10월~2018년 3월 목요일, 2018년 4월부터 금요일 던디 (이전부터 단발 게스트 출연).
  • 프로 야구 그럭저럭 옛날 이야기 (Amazon 프라임) ※ 2019년 10월부터 고정 게스트
  • 주간 뉴스 리더 (TV 아사히) ※ 2021년 4월 3일부터 코멘테이터로 출연

; 준 고정

:* 오와라이 와이드쇼 마르코포로리! (간사이 TV) ※ 야구 관련 화제 (주로 「퍼시픽 리그 잔혹 이야기」)에서 「의견가」로 출연

:* 하토리 신이치 모닝쇼 (TV 아사히) ※ 호토쿠 학원 고등학교 투수로 여름 선수권 전국 제패 경험을 인정받아, 2018년 제100회 선수권 기념 대회 직후부터 고교 야구나 NPB 드래프트 회의 관련 화제에 코멘테이터로 출연.

:* 미즈노 마키의 마법의 레스토랑 시리즈 (마이니치 방송) ※ 『미즈노 마키의 마법의 레스토랑 R』시대에는 2개월에 1번 정도 출연.

  • 마츠오 유지의 피테칸 와이드 (TBS 라디오, 2001년 10월 1일 - 2002년 9월) ※ 야구 해설가로서 처음으로 레귤러 출연
  • 정크 SPORTS (후지 TV)
  • 스포르토! (후지 TV)
  • 곤니치와 곤짱 점심이에요! (MBS 라디오) ※ 한 달에 한 번 월요일 전화 출연
  • 키니나루 오세로 (ABC TV) ※ 격주
  • 쓰-쾌! 오히루 도킷 (CBC 라디오) ※ 수요일 퍼스널리티
  • 카네무라 요시아키의 건강하게 있어! (라디오 오사카) ※ 퍼스널리티
  • 가미이즈미 유이치의 에에나! (MBS 라디오, 2015년 3월 30일 - 2021년 9월 27일)
  • * 월요일 파트너로 전편 출연. "주간 카네스포" 해설 코너를 담당했으며, 카미이즈미 유이치 휴가 중에는 '카네무라 요시아키의 에에나!'로 퍼스널리티 대리.
  • 타마부쿠로 킨타로의 나이트 스내커즈 니시오기쿠보 편
  • 힘내라 일본 프로야구!? (J SPORTS) ※ 프로 야구 오프 시즌 방송
  • J SPORTS STADIUM ※ 주로 롯데전 해설 담당. 2014년 TV 신히로시마 제작분(지상파 동시 방송) 출연.
  • 아사짱! (TBS 텔레비전) ※ 스포츠 코멘테이터, 2019년 4월부터 격주 수요일, 같은 해 7월~9월 부정기적 화요일 출연.
  • 간사이 TV 제작 프로그램
  • 베리 베리 새터데이!
  • FNN 슈퍼 뉴스 앵커 ※ 목요일 제1부 코멘테이터
  • 타카진 가슴 가득→가슴 가득 서밋
  • 코야부루! SPORTS
  • MBS 텔레비전 제작 프로그램
  • 친푸이푸이 ※ 연 2회 "MBS 라디오 스페셜 위크" 기간 중 월요일에 '카미이즈미 유이치의 에에나!' PR 겸 사이멀 방송으로 등장. 2017년(11월 22일)과 2018년 수요일 전편 패널 출연.
  • 켄고로 서커스단 ※ "단원"으로 레귤러 출연
  • 싸워라! 스포츠 내각 ※ 2016년 10월 레귤러 방송 개시, "프로야구 대신" 직함으로 출연.

3. 2. 기타 활동


  • 입단 당시 등번호는 '''28'''번이었지만, 이전까지 '''28'''번을 달았던 하나부사 겐이 착용하던 유니폼이 등 네임 와펜(HANABUSA)만 제거된 채 입단 회견 직전에 가네무라에게 인계되었다. 당시 긴테쓰 구단에서는 그러한 인계가 당연했고, 입단 기자 회견 때 새 유니폼을 받은 신인 선수는, 가네무라와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3학년 때 여름 선수권 전국대회 결승에서 던진 경험이 있는 오타 코지뿐이었다고 한다.[45]
  • 긴테쓰 입단 당시 "큐우코 료"(당시 본거지 중 하나인 후지이데라 구장 외부에 있던 구단 합숙소)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고졸 루키임에도 파마를 하고 입소한 탓에, 입소 후 드래프트 1순위로 입단한 가네무라를 시기하는 선배 선수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가네무라에 따르면, 기숙사 자실에 보관하고 있던 금품을 도난당하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15] 그러나, 구리하시 시게루, 히라노 미쓰야스, 모리와키 코지 등, 엄격하면서도 다정한 자세로 가네무라에게 대했던 선배 선수도 적지 않았다.[46]
  • 모리와키는 특히 가네무라를 마음에 들어했지만, 시즌 중에 1군에 동행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가네무라는 큐우코 료에서 고립되었다. 구단의 대우나 기숙사 식사에 질려 통금 시간 위반이나 자가용 운전을 반복하게 되었고, 결국 기숙사장의 권유를 받아 1년 만에 퇴소했다. 가네무라는 "환경이 나빠서 (큐우코 료에서) 도망친 것과 같고, 입단하고 나서 바로 플레이에서 결과를 남기지 못했던 것도, 그러한 환경을 견딜 만큼 마음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입단 1년 차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시 하고 싶다"라고 말했다.[15]
  • 2년 차인 1983년 선수 명감의 취미란에는 "가라오케, 술"이라고 적혀 있었다.
  • 현역 생활에서 올스타전에 출전한 것은 1990년 뿐이었고, 당시 긴테쓰 감독이었던 오기 아키라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 1988년 오프 시즌에 '퀴즈 일꾼'(아사히 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10.19 제2경기에서 긴테쓰가 아리토 통세이 (당시 롯데 감독)의 항의를 사이에 둔 시간 초과 무승부로 퍼시픽 리그 우승을 놓친 것을 배경으로, 사회자 시마다 신스케로부터 "아리토 감독 싫어하잖아"라는 질문을 받고 "정말 싫어합니다!"라고 대답했다.
  • 큐우코 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퇴소 후 선수 회장을 맡는 등, 선수 대우나 구단 시설 개선에도 힘썼다.
  • 1984년 긴테쓰는 메이저리거 돈 머니를 좋은 조건으로 입단시켰지만, 머니가 구장 내 락커나 선수용 욕장의 더러움에 실망한 끝에 단기간에 퇴단했다. 또한, 본거지에는 구단 임원 전용 주차장이 있었지만, 선수 전용 주차장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노모 히데오 재적 중에는, 본거지 공식전에서 개막 투수를 맡은 노모가 자가용으로 구장에 갔을 때, 구단 직원으로부터 주차를 거부당했다. 가네무라는 선수 회장 시절 구단 간부와 끈기 있게 교섭하여 선수 전용 주차장 확보, 욕장 개조 등을 실현했다.[47][48]
  • 가네무라는 "오른손 유구골 골절(1988년 10월)에 의한 통증이 1989년에 들어서도 가라앉지 않았던 것은, 당시 팀 닥터(구단 전속 의사)의 오진에 따라 (처음)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라며[15], 회복 후 구단에 요구하여 팀 닥터 제도를 폐지시켰다. 이를 계기로 선수회의 총의로 타치바나 류지를 트레이닝 코치로 초빙했다.
  • 1989년 시즌 종료 후, 구단 우승 기념 여행으로 가족과 함께 하와이 섬이나 오아후 섬으로 갔다. 하지만 가족 참가비 부담을 요구받는 등 구단의 대응이 좋지 않아, 가네무라를 필두로 참가한 선수들이 귀국 후 "다음번에 우승하면, 구단 주최 여행을 거절하는 대신, 선수와 가족끼리 아리마 온천에 묵자"라고 약속하는 상황이었다.[15]
  • 긴테쓰가 이후 우승한 것은 가네무라 은퇴 후인 2001년뿐이었고, 구단도 오릭스 블루웨이브로의 흡수 합병 및 오릭스 버팔로즈 발족 (2004년)을 계기로 소멸되었다. 2004년 9월 27일 긴테쓰 및 블루웨이브 마지막 공식전에서는, 간사이 TV가 중계를 편성했기 때문에, 긴테쓰 OB인 가네무라가 블루웨이브 OB인 호시노 신유키와 함께 중계 해설을 담당했다.
  • 이하라 하루키와는 자주 언쟁을 벌였다. 이하라는 이 일에 앙심을 품고 있었던 듯, 가네무라가 세이부에 이적했을 때는 입단 직후에 불러내 장시간 정좌를 시키거나, 미팅에서 험담을 반복하는 등 보복을 가했다.

4. 에피소드


  • 야구 외에 유도 초단을 땄고, 골프도 즐겨 쳤다. 현역 은퇴 후에는 자선 골프 대회에 참가하거나 코우즈마 진이치로, 아사치 요스케 같은 프로 골퍼들과 교류하고 있다.[31][38][44]
  • 셋째 아들 아키노리는 고등학교 때까지 야구 선수를 꿈꿨으나, 이시카와 료의 영향으로 골프로 전향했다. 니혼 체육 대학 골프부에서 활동 후 프로 골퍼의 길을 포기하고, 골프 잡지 『EVEN』의 편집부원과 아사치의 전속 캐디를 거쳐 프리랜서 프로 캐디로 활동 중이다.[38]
  • 초등학교 시절 공부를 잘했고 6년 동안 학급 위원을 맡았다.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않아 어머니가 부업으로 가계를 도왔고,[39] 아버지는 중학교 졸업 후 취업을 권유했다. 하지만 고시엔에서 활약하는 호토쿠 학원 고등학교 야구부 이야기를 듣고 프로 야구보다 호토쿠 학원에 동경을 품게 되었다.[8] 이러한 경험으로 고교 야구 특기생 제도에 찬성한다.[40]
  • 친형 히로오도 호토쿠 학원 고등학교 외야수 출신으로, 가와이 악기에 입사하여 가와이 악기 경식 야구부에서 오가와 쥰지와 팀 동료였다.[41] 오가와는 요시아키가 긴테쓰에 지명된 해에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지명되었고, 은퇴 후 요시아키와도 면식이 있다.
  • 1981년 한일 친선 고교 야구에 일본 선발팀으로 출전하여 가족과 함께 한국에 갔다.[2] 당시 가족 모두 조선적이었기 때문에 임시 여권 취득에 어려움을 겪었지만,[2] 정부의 배려로 아버지의 누나들과 재회했다. 이 일로 가족 모두 대한민국 국적으로 변경했다.[2] 어머니는 "일본인이 아니니까 지면 안 된다"며 격려했고, 아버지는 2019년 6월에 별세했다.[44]
  • 가네무라는 시합 중 현지 여성과의 관계로 귀국 후 비뇨기과 진료를 받았다.
  • 긴테쓰는 드래프트 전 하라 다쓰노리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했지만, 구단 사장과 대표 교체 후 백지화되어 "사기꾼 같다"고 생각했다. 결국 계약금 6000만, 연봉 380만에 입단했고, 계약금은 부모님께 드리고 긴테츠 부동산에서 토지를 구입했다.[43] 어머니는 다카라즈카 컨트리 클럽을 퇴직하고 야키니쿠점을 경영하다 은퇴했다.[44]
  • 입단 당시 등번호는 '''28'''번이었는데, 하나부사 겐의 유니폼에서 등 네임 와펜만 제거된 채 인계되었다. 당시 긴테쓰에서는 흔한 일이었고, 새 유니폼을 받은 신인은 오타 코지뿐이었다.[45] 오타는 1982년에만 팀 동료였고, 은퇴 후 가네무라처럼 마이니치 방송 야구 해설가로 활동한다.
  • 긴테쓰 입단 당시 구단 합숙소 "큐우코 료"에 살았는데, 입단 경위와 파마 머리 때문에 선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금품 도난도 여러 번 있었고, 현역 은퇴 후 인터뷰에서 실태를 밝히기도 했다.[15] 쿠리하시 시게루, 히라노 미츠야스, 모리와키 코지 등 좋은 선배들도 있었다.[46]
  • 모리와키는 가네무라를 아꼈지만, 1군 동행이 많아 가네무라는 고립되었다. 구단 대우와 기숙사 식사에 질려 통금 시간 위반, 자가용 운전을 반복하다 1년 만에 퇴소했다. 본거지 근처 지인의 집을 전전하며 이발소 한 칸이나 자가용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가네무라는 "환경이 나빠 도망친 것 같고, 마음이 약했기 때문"이라며 후회했다.[15]
  • 1983년 선수 명감 취미란에는 "가라오케, 술"이라고 적혀 있다.
  • 올스타전 출전은 1990년 오기 아키라 감독 추천이 유일했다.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팬 투표 3루수 부문에서 이시게 히로노리, 마츠나가 히로미에 밀렸다.
  • 1988년 '퀴즈 일꾼'에 출연, 10.19 제2경기 무승부로 우승을 놓친 것에 대해 시마다 신스케가 "아리토 통세이 감독 싫어하잖아"라고 묻자, 처음에는 말을 흐렸지만 "정말 싫어합니다!"라고 말했다.
  • 선수 대우 및 구단 시설 개선에도 힘썼다.
  • 1984년 돈 머니가 구장 시설에 실망해 단기 퇴단했고, 선수 전용 주차장도 없었다. 노모 히데오는 주차 거부를 당하기도 했다. 가네무라는 선수 회장 시절 끈기 있는 교섭으로 선수 전용 주차장, 욕장 개조 등을 실현했다.[47][48] 팀 닥터 오진으로 인한 오른손 유구골 골절 통증[15]을 계기로 팀 닥터 제도를 폐지시키고, 타치바나 류지를 트레이닝 코치로 초빙하여 1989년 리그 우승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스즈키 케이시 감독 취임 후 가네무라처럼 스즈키와 대립, 1993년 긴테쓰를 퇴단했다.
  • 1989년 우승 기념 여행은 가족 참가비 부담 등 대응이 좋지 않아, 선수들이 "다음 우승 때는 선수와 가족끼리 아리마 온천에 가자"고 약속했다.[15]
  • 긴테쓰는 가네무라 은퇴 후인 2001년에 우승했고, 2004년 오릭스 버팔로즈 발족으로 소멸되었다. 긴테쓰 마지막 공식전에서 가네무라는 호시노 신유키와 함께 해설하며 눈물을 흘렸다.
  • 이하라 하루키와는 노모의 포크볼 신호 문제로 자주 언쟁을 벌였다. 이하라는 앙심을 품고 가네무라가 세이부에 이적했을 때 정좌, 험담 등 보복을 가했다.
  • 1996년 5월 1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 난투극에 "마스코트 배트를 들고 참전했다"고 알려져 벌금과 주의를 받았다.[49] 후년 CBC 라디오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스트레칭 중 난투가 일어나 보러 갔더니 휘말려 배트를 들고 있었다"고 말했다.

5. 상세 정보

수상
주니어 올스타 게임 MVP1회 (1982년)[15][50][51][52]



기록
첫 출장1982년 9월 14일, 세이부 라이온즈 후기 8차전 (니혼 생명 구장), 8회에 하네다 코이치를 대신하여 3루수로 출장
첫 선발 출장1982년 9월 21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후기 11차전 (고라쿠엔 구장), 8번·3루수로 출장
첫 안타위와 같음, 4회에 키다 이사무로부터 중전 안타
첫 타점1983년 5월 12일, 지바 롯데 마린스 4차전 (가와사키 구장), 8회에 나카네 마사히로의 대타로 출장, 스티브 셔리로부터 동점 적시타
첫 홈런1983년 10월 21일, 오릭스 버팔로스 26차전 (후지이데라 구장), 2회에 키노시타 토모히로로부터 3점 홈런
100홈런1992년 4월 21일, 지바 롯데 마린스 1차전 (니세이 구장), 5회에 소노가와 카즈미로부터 솔로 홈런(역대 169번째)
1000경기 출장1994년 6월 11일, 닛폰햄 파이터즈 11차전 (도쿄 돔), 7번·3루수로 선발 출장(역대 319번째)
올스타전 출장1회 (1990년)
사이클 히트1986년 7월 17일, 한큐 브레이브스 12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스타디움)(역대 39번째)


  • 1982년 7월 23일 주니어 올스타 게임(요코하마)에서도 사이클 안타를 달성했다.
  • 1993년 FA 제도 도입 후 NPB에서 FA 권리 행사로 입단한 선수가 입단 후 트레이드로 타 구단으로 이적한 첫 사례이다.[24]
  • 1997년 4월 18일 세이부 라이온스 구장에서 열린 친정팀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와의 경기에서 3년 만에 퍼시픽 리그 공식전에 출전, 7번 지명타자로 선발 출장하여 첫 타석에서 고이케 히데로로부터 솔로 홈런을 기록하며 이적 후 첫 안타를 신고했다.
  • 1998년 일본 시리즈 6차전(10월 26일)에서 9회초 1사 1루, 1점 뒤진 상황에 대타로 기용되었으나 사사키 카즈히로에게 병살타를 기록하며 팀의 시리즈 패배를 막지 못했다.[27]
  • 1999년 9월 30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 (지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은퇴 경기를 치렀다.
  • 킨테츠 시절을 포함하여 3번 출전한 일본 시리즈에서 소속 팀이 모두 패배하여 시리즈 우승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등번호
28 (1982년 - 1986년)
6 (1987년 - 1997년 중도)
24 (1997년 중도 - 1999년)


5. 1. 연도별 타격 성적

연도소속 팀경기타석타수득점안타2루타3루타홈런루타타점도루도루자희생번트희생플라이볼넷고의사구사구삼진병살타타율출루율장타율OPS
1982긴테쓰717170200020000000070.118.118.118.235
198338837661530224111040300192.197.228.316.544
198454115941116302251020621102233.170.266.266.532
198542807211213133580030401131.292.338.486.824
19861304934376612023623224673110439038310.275.335.513.848
198713053146951114122141726143811422110111.243.300.367.667
1988993793233793170141524821534820657.288.377.471.848
19898128824432557078330021212902686.225.312.340.652
199011345037667103251171815177526433856.274.382.481.863
1991130526467651261631619660226150228813.270.342.420.762
19921023903355087113131434453414842667.260.355.427.782
1993471761541434613511811501512212.221.298.331.629
199480279254347615081152821331702473.299.344.453.797
1995주니치2888794144012150120700156.177.244.266.510
19964245401710086000050060.175.267.200.467
1997세이부7315212413381013592630022204286.306.421.476.897
199841523821020115701031001110.263.404.395.799
199925604428000872000163062.182.400.182.582
통산:18년12624204364346693915818127151448734237333430172575285.258.337.416.753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5. 2. 연도별 수비 성적


합자

살보

살실

책병

살수

율시

합자

살보

살실

책병

살수

율시

합자

살보

살실

책병

살수

율시















수허


루도

자저

율1991--126892571723.953120001.000010.0001992--92621531416.939-1993--47336968.944-1994251011.000-62428628.985-1995--26193042.925-1996--123811.917-1997181433317.980-102001.000-19984242011.000-20000.000-19991072826.976-10000.000-


5. 3. 수상

주니어 올스타 게임 MVP: 1회 (1982년)[15][50][51][52]

5. 4. 기록

가네무라 요시아키의 프로 야구 선수 시절 주요 기록은 다음과 같다.

1993년 FA 제도가 도입된 NPB에서 FA 권리 행사로 입단한 선수가 입단 후 트레이드로 타 구단으로 이적한 첫 사례이다.[24]

1997년 4월 18일 세이부 라이온스 구장에서 열린 친정팀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와의 경기에서 3년 만에 퍼시픽 리그 공식전에 출전, 7번 지명타자로 선발 출장하여 첫 타석에서 고이케 히데로로부터 솔로 홈런을 기록하며 이적 후 첫 안타를 신고했다.

1998년 일본 시리즈 6차전(10월 26일)에서 9회초 1사 1루, 1점 뒤진 상황에 대타로 기용되었으나 사사키 카즈히로에게 병살타를 기록하며 팀의 시리즈 패배를 막지 못했다.[27]

1999년 9월 30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 (지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은퇴 경기를 치렀다.

킨테츠 시절을 포함하여 3번 출전한 일본 시리즈에서 소속 팀이 모두 패배하여 시리즈 우승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연도포수1루수2루수3루수
시합자살보살실책병살수비율포일기도수허용 도루도루자도루 저지율시합자살보살실책병살수비율시합자살보살실책병살수비율시합자살보살실책병살수비율
1982---52421.750
1983-23133328.986-1181421.917
1984-10264001.000-36341421.917
1985-6130011.000210001.00024163974.887
1986---128922811634.959
1987-5161011.000-1301062741222.969
1988-670001.000-9967223723.976
1989-5402021.000401001.00079571691119.954
1990---108742121716.944
1991120001.000010.000--126892571723.953
1992---92621531416.939
1993---47336968.944
1994-251011.000-62428628.985
1995---26193042.925
1996---123811.917
1997-181433317.980-102001.000
1998-4242011.000-20000.000
1999-1072826.976-10000.000
통산120001.000010.0008744521735.985611001.0009897041887122181.955


5. 5. 등번호

참조

[1] 뉴스 女性デュオ「花*花」、元プロ野球・金村さん高砂応援大使に https://www.kobe-np.[...] 神戸新聞 2018-01-06
[2] 뉴스 朝日新聞 2017-03-15
[3] 서적 名選手たちの甲子園 竹書房
[4] 간행물 "『金村義明 プロ野球人情派』vol.05「1981年8月21日 全試合をひとりで投げ抜き、悲願の全国制覇達成」" http://sportiva.shue[...] Sportiva 2010-08-16
[5] 뉴스 【甲子園V腕座談会】(2)池田もPLも練習しなかった https://web.archive.[...] スポーツ報知 2015-08-09
[6] 뉴스 亀梨和也 NHK甲子園特番ナビゲーターに「感動体感したい」 https://www.sponichi[...] スポーツニッポン 2015-07-21
[7] 뉴스 【甲子園V腕座談会】(4)3年生・水野VS1年生・桑田 https://web.archive.[...] スポーツ報知 2015-08-09
[8] 뉴스 【甲子園V腕座談会】(1)池田もPLも練習しなかった https://web.archive.[...] スポーツ報知 2015-08-09
[9] 웹사이트 天才テリー伊藤対談「金村義明」(2)逆境の中で甲子園優勝をもぎ取った | アサ芸プラス https://www.asagei.c[...]
[10] 웹사이트 金村義明さんに聞いた『プロ野球とおカネ』の話 ~前編~ | BASEBALL KING https://baseballking[...]
[11] 뉴스 【甲子園V腕座談会】(3)金村さんの秘技「おちょくり投法」 https://web.archive.[...] スポーツ報知 2015-08-09
[12] 뉴스 【7月23日】1982年(昭57) 一軍未経験ですが…金村義明 “球宴”史上初のサイクル安打 http://www.sponichi.[...] スポーツニッポン 2012-07-23
[13] 간행물 "『金村義明 プロ野球人情派』vol.04「1982年7月23日、ジュニアオールスターでサイクルヒット&MVP」" http://sportiva.shue[...] Sportiva 2010-07-15
[14] 웹사이트 http://npb.jp/bis/pl[...]
[15] 서적 週刊ベースボール 1958 - 2018球団別ベストセレクション 近鉄編 2019-02-27
[16] 뉴스 【日本ハム】清宮と同箇所骨折経験持つ金村義明氏「まずは手の筋力取り戻せ」 https://hochi.news/a[...] スポーツ報知 2019-03-04
[17] 잡지 週刊ベースボール 1989-04-10
[18] 뉴스 あの金村も急造捕手経験 ロッテ・五十嵐は全ポジション出場達成 https://www.sponichi[...] 스포츠니폰 2014-12-10
[19] 웹사이트 中村紀洋 近鉄監督から「調子に乗るな」と釘刺された過去も https://www.news-pos[...]
[20] 문서 現役引退後に著した『勝てる監督 負けるボス』では、「最低の監督」という表現で鈴木を批判している。
[21] 간행물 "『金村義明 プロ野球人情派』vol.10「1995年2月14日 野茂英雄、ドジャース入団」" http://sportiva.shue[...] Sportiva 2010-12-21
[22] 웹사이트 金村義明氏が明かすFA失敗の舞台裏、口約束で1億円だった年俸は25%に https://news.livedoo[...]
[23] 웹사이트 カネやん「バカヤロー!」 プロ野球審判が語る“猛抗議の舞台裏” https://friday.kodan[...]
[24] 웹사이트 トレードはこうやって決まる!現場とフロントの連携 http://baseball.prof[...]
[25] 뉴스 金村義明氏「そのパターンでした」 中日から西武へトレード移籍した裏側を明かす https://www.sponichi[...] 스포츠니폰 2022-09-01
[26] 웹사이트 金村義明氏が明かすFA失敗の舞台裏、口約束で1億円だった年俸は25%に - ライブドアニュース https://news.livedoo[...]
[27] 간행물 "『金村義明 プロ野球人情派』vo1.07「1998年10月26日 涙の横浜ベイスターズ、38年ぶり日本一」" http://sportiva.shue[...] Sportiva 2010-09-21
[28] 웹사이트 フーガキャスティングの講師一覧|金村義明 http://fuga-casting.[...]
[29] 웹사이트 NOMOベースボールクラブ 運営役員紹介 http://nomo-baseball[...]
[30] 간행물 "『金村義明 プロ野球人情派』vol.06「2000年9月17〜27日 シドニー五輪、初のプロ・アマ合同チームの裏側」" http://sportiva.shue[...] Sportiva 2010-09-06
[31] 웹사이트 金村義明プロフィール http://y-kanemura.ne[...]
[32] 블로그 金村義明オフィシャルブログ2018年1月3日付記事「謹賀新年」 http://gol-go.com/ka[...]
[33] 블로그 ANAクラウンホテル大阪 http://gol-go.com/ka[...] 2015-12-20
[34] 뉴스 金村義明氏 初の冠番組「ええかげんにせぇ〜!」MBSラジオで10・10開始 https://www.sponichi[...] 스포츠니폰 2017-09-23
[35] 웹사이트 2019年の一大トレンド?プロ野球OBの「Youtubeチャンネル」まとめ https://baseballking[...] 2019-12-28
[36] 뉴스 金村義明さん有料ニコ動番組が無料ユーチューブに上がり運営側に「だまされた!」広告料1円も入らず https://hochi.news/a[...] スポーツ報知 2020-03-23
[37] 웹사이트 チャンネル終了と、3月分会員料金の返済について(会員様宛てメール配信) https://ch.nicovideo[...] 2020-03-24
[38] 웹사이트 香妻陣一朗が″金村親子″に感謝の上昇 https://www.jgto.org[...]
[39] 웹사이트 輝きピープル 野球解説者・タレント・元プロ野球選手 金村義明さん https://www.city.kyo[...] 京都市人権総合情報誌「きょう☆COLOR」Vol.5(平成28年12月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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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서적 在日魂
[44] 뉴스 金村義明さん 働きづめ、甲子園Vで親孝行 https://www.asahi.co[...] 朝日新聞 201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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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간행물 パロ野球ニュース 1997-05
[51] 간행물 서부의 두 쌍둥이 199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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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간행물 上泉雄一のええなぁ! 2016-02-01
[54] 웹사이트 株式会社パートナーシステム・講師プロフィール 金村義明 http://www.p-system.[...]
[55] 간행물 第 56 回ギャラクシー賞 ラジオ・テレビの MBS2作品が奨励賞を受賞 https://www.mbs.jp/k[...] 毎日放送2019年4月26日付プレスリリース
[56] 뉴스 金村義明氏が片岡篤史「檜風呂」応援誕生のきっかけを回顧 https://www.news-pos[...] 週刊ポスト 2017-08-05
[57] 뉴스 「五十肩と痛風…」金村義明さん、ソフト工藤監督に投げ勝った記念日にレジェンド始球式 https://hochi.news/a[...] スポーツ報知 2018-08-17
[58] 뉴스 【高校野球】レジェンド始球式で金村義明氏ワンバウンド投球「お恥ずかしい」 https://web.archive.[...] 東スポWeb 2018-08-17
[59] 뉴스 金村義明氏 番組史上最悪「余命1年」告知に衝撃 「息子3人の結婚式も見たいし…」 https://www.sponichi[...] スポーツニッポン 2020-03-02
[60] 뉴스 「余命1年」を宣告された金村義明が、延命のために始めたこと https://gendai.media[...] 現代ビジネス 2020-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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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문서 2009年度より水曜のMCを担当
[63] 뉴스 현대 재일교포 김의명 입단교섭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96-11-01
[64] 뉴스 "金在博(김재박) 스카우트 하겠다" 日(일)프로팀들 2千萬(천만)엔 제의…눈독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80-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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